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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진지한 철학적 문제 → 자살 →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있는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가지인가 열두 가지 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음 일이며, 장난이다.

니체의 주장 : 철학자가 존경 받으려면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그 대답에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머릿속에서 분명해지도록 하려면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어떤 문제가 다른 문제보다 더 절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 → 그 질문에 따라 마땅히 실천하게 되는 행동이 바로 그 판단의 기준, 근거이다.

존재론적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은 없다(갈릴레이 예시, 하찮은 문제) 그런가하면 역설적이게도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주는 이념 혹은 환상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의하면 삶의 의미야 말로 질문들 중 가장 절박한 문제가 아닐까?

→ 하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모든 근본적인 문제 (목숨을 버리게 만드는 문제들이나 반대로 살려는 열정을 배가시키는 문제들) 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은 아마도 두 가지 : 라팔리스의 사고방식, 돈키호테의 사고방식

💡 라팔리스 진리: 프랑스 귀족이자 군인. 그가 죽은 뒤 그를 기리는 무덤에 “슬프도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부러움을 샀을 텐데.”(Il ferait encore envie.) 라는 비명이 새겨졌는데, 후세에 이 비명의 후반부가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을텐데”(Il serait encore envie.) 로 잘못 읽히는 바람에 **“자명한 사실”** 을 뜻하게 됨

방식 : 감동을 주는 동시에 분명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직 자명함과 감정의 고양 사이의 균형 뿐이다.

이토록 소박하면서도 비장한 주제를 놓고 생각할 때는 유식하고 고전적인 변증법을 동원하느니 보다 좀 더 겸허한 마음 자세, 즉 양식과 더불어 공감에서 비롯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 양식(良識) : 어질 량, 알 식 ****1, 양심적인 지식과 판단력 2, 넒은 경지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뛰어난 식견과 훌륭한 판단력 3, 도덕적, 윤리적으로 건전한 생각이나 분별

지금까지 자살은 그저 사회적 현상으로만 취급되어 짐. 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생각과 자살의 관계를 문제 삼아 본다.

자살과 같은 행위는 마치 어떤 위대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침묵 속에서 준비되어 진다. 당사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예시 :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오 년 전에 딸을 잃은 다음부터 사람이 변하기 시작했고, “골병이 들었다” 라고 표현 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예시는 찾기 어렵다.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 → 정신적 침식으로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 이러한 생각의 시작 단계에서 사회는 별 관련이 없다.

벌레는 이미 사람 마음속에 박혀있고, 우린 그 벌레를 찾아야 한다. 삶을 직시하는 명철한 의식에서 빛의 세계 밖으로의 도피로 인도하는 이 치명적 유희, 바로 이 유희를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 위대한 작품의 시작(마음의 침묵 속), 유희와 벌레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 을 일맥상통하게 보도록 노력하자 사회적인 부분을 제외한 어떠한 원인이 자살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

자살에는 수많은 동기가 있지만 가장 표면적인 이유들이 가장 유력한 이유는 아니었다. 깊이 반성한 끝에 자살하는 일은 드물다.(그렇다고 이 가설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됨.) 거의 언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위기의 발단이 된다.

실연, 불치의 병 과 같은 설명들은 그럴듯한 설명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바로 전 날, 절망에 빠진 한 사람에게 친구 하나가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적은 없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바로 그 자가 죄인이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그때까지 유예 상태에 있던 모든 원한과 모든 권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선택이 죽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정확한 순간, 그 미묘한 과정을 꼬집긴 어렵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행동 자체에서 그 행동이 가정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보다 용이하다.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 드라마에서 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일상적인 표현으로 ‘굳이 살 만한 것이 못 된다’ 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함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첫째는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

  •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

을 본능적으로라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잠마저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이 측량할 길 없는 감정은 도대체 뭘까 ?

이 것을 시원찮은(아무런, 대충의) 이유를 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이다.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 이러한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는 구원이 없다.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 이러한 것이 바로 부조리의 감정 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스스로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터이므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감정과 허무에의 갈망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 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의 관계를 밝히고 자살이 어느 정도로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데 있다.

“속임수를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를 원칙으로 삼아 보자. 따라서 “삶이 부조리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를 우리는 원칙으로 삼아볼 수 있다.

→ 삶이 부조리하다고 믿는 사람은 마땅한 행동이 뒤따른다.

이런 식의 결론이 과연 우리에게 불가해(不可解)한 조건의 삶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라고 요구하는지 어쩌는지 분명하게, 그리고 공연(空然)히 비장(備藏)해하지 말고 자문해 보는 것은 정당한 호기심의 발로일 터 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용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다.

💡 불가해(不可解)한 : 이해할 수 없는 공연(空然)히 : 아무 까닭이나 실속이 없게 비장(非藏)해 : 갖출 비, 감출 장 : 두루 갖추어서 간직하거나 감추어 두다.

명확한 말로 제시할 경우 이 문제는 단순하면서도 풀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 문제 → 부조리의 감정 → 단순함 ?)

사람들은 문제가 단순하면 그 답도 그에 못지않게 단순하며, 자명한 것은 자명함을 전제한 다고 잘못 생각한다.

선험적으로, 그리고 문제의 항을 뒤바꿔서 생각해 보면 사람에겐 자살을 하든가 하지 않든가 두 가지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듯이, 철학적 해결에도 긍정과 부정 두 가지밖에 없는 거 같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여전히 의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꼬는 말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동시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마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 행동하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니체의 기준에 따르면 실상 그들은 이런 식으로건 저런 식으로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말보단 행동이 중요

반대로 자살하는 사람들도 삶의 의미를 굳게 믿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와 같은 모순은 흔하다. 아니, 오히려 그토록 논리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이 점에 있어서만큼 모순이 극명한 경우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적 이론과 그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실제 행동을 비교하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그러나 삶에 의미가 없다고 굳게 믿는 사상가들 중에 그 삶을 거부할 정도로까지 자신의 논리를 밀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작 문학에 속하는 키릴로프, 전설에 속하는 페레그리노스 그리고 가설에 속하는 쥘 르키에의 예외가 있을 분이다.

💡 **문학에 속하는 키릴로프** :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무신론자.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지배자임을 보여 주는 증거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실제로 자살을 감행한다. **전설에 속하는 페레그리노스** : 견유학파의 철학자로 올림픽 경기 때 사람들이 만류해 줄 것으로 예상하고 불속에 뛰어들 수 있다고 공언한 다음 실제로 행동에 옮겼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아 불에 타 죽었다. **가설에 속하는 쥘 르키에** : 사르트르와 윌리엄 제임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철학자. 창조적 자유 의지를 주장하며 대양 가운데로 헤엄쳐 나가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1936년 이 철학자에 대한 장 그르니에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그의 사상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음식을 가득 차려 놓은 식탁에 앉아서 자살을 논했다는 쇼펜하우어의 경우는 흔히 우스갯거리로 인용되곤 한다.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농담거리가 아니다. 비극적인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결국 그 사람됨을 판한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온갖 모순과 혼미 앞에서, 사람이 삶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견해와 그 삶을 버리는 행위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어야 마땅할 것인가? 너무 이런 방향으로 과장할 일은 못된다.

→ 아무리 앞서 이야기한 여러 모순과 혼미의 예시를 보았더라도 사람의 생각과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무책임하다.

이유 :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애착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참 이상으로 강한 그 무엇이 있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않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의 위협과 마주치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워서 익힌다. 나날이 조금씩 더 죽음을 향하여 우리를 재촉해 가는 이 경주에서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모순의 본질은 내가 회피(esquive)라고 부르고자 하는 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회피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이른바 파스칼적 의미에서의 ‘위희(慰戱 : 위로할 위, 놀 희 / divertissement : 오락, 연예, 여흥)’ 이하의 것인 동시에 이상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시론의 제3의 주제인 치명적인 회피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내세의 삶(우리가 그 삶을 얻을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 말이다.

→ 희망은 속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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